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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한국역사: 청동기 시대 ~ 원삼국시대

by 구별space 202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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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국가가 이룩이 됨으로써 인구가 상승하고 약속이 필요하자 법이 생겨난 것이다.

 

고조선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중국 최초의 국가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왕검이 요임금 즉위후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이름을 조선이라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이를 근거로 연도를 계산하면 기원전 2333(4400년 전)이라고 할 수 있으나 해당 기록은 단군 신화와 함께 서술된 것으로 그 정확성을 믿기는 힘들다.

 

한편 단군은 고조선을 다스리던 군장의 칭호로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단군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름이나 재위 연도를 알 수는 없다. 일각에서는 환단고기를 근거로 단군의 이름과 재위기간을 거론하는 경우도 있으나, 환단고기는 많은 면에서 신뢰성을 갖추지 못한 자료로 비판되고 있으며 역사 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고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와 위만조선 시기로 나뉜다. 근대 이전의 옛 역사서에는 기자조선이 등장하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평가된다. 고조선이 중국측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제나라의 관자(管子)로 제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공자는 동방예의지국인 구이로 망명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구이는 중국에서 고조선을 달리 부르던 이름이다.

 

강역 문제

고조선의 도읍이었던 평양성이 요동이나 요서에 있는 평양인지 아니면 지금의 평양시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조선의 특징적인 유물인 세형동검이 만주지역에서도 출토되고 문헌에 고조선이 연나라와 싸워 패했다는 기록이 있어 기원전 3세기를 전후로 하여 남쪽으로 천도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와 사회 제도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대에 대한 기록에는 박사, , 대부, , 대신, 장군 등의 관직명이 남아있어 중앙정치조직이 있었음을 알게해 준다. 그러나 지방 세력은 독자적인 정치 권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조선상 역계경이 한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왕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휘하 2천호를 거느리고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해 버리는 일이 있었다. 고조선은 노비와 귀족, 왕이 있는 신분제 사회였고 8조법과 같은 법률이 있었다.

 

철기 시대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기원전 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중국의 철기 문화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철 기술의 도입으로 만들어진 철제 농기구는 농업 생산량을 크게 증가시켰다. 당시 주요 유물로는 철제 농기구, 철제 무기와 함께 막대 모양의 쇳덩이인 덩이쇠가 있는데 이 덩이쇠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지배 계급이 철의 주조능력을 중요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철기 문화는 무쇠와 강철이 거의 동 시대에 발전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

위만조선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개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낙랑시대 금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국보 제89호 금제교구)

낙랑시대 금으로 만든 허리띠 장식(국보 제89호 금제교구)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나 진국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 섭하를 보내 우거의 무역독점 중지를 요구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한과 고조선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한사군은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원삼국 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원삼국 시대 및 중화 제국주의 통치 및 열국 시대입니다.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증가된 생산력과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는 여러 소국들이 건설되었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하였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고조선 이후 세워진 부여는 철기를 바탕으로한 연맹 왕국이었다. 이후 동예, 옥저, 고구려, 마한, 진한, 변한, 탐라, 우산국과 같은 연맹체 왕국들이 출현하였다. 이후 이러한 연맹 왕국에서 출발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주변의 왕국들을 병합하여 성장하게 된 삼국시대까지 여러 소국과 대국이 혼재하여 있던 이 시기를 원삼국시대 또는 열국시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