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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한국역사: 삼국시대~가야연맹

by 구별space 2024.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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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자 고유의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그 시작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주변의 소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졌다. 이들 나라는 이렇듯 고조선 사회의 외곽에서 시간적 선후를 지니며 각자 독자적으로 성립했고, 4세기 중반 이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서로 별다른 교섭 없이 발전해 나갔다.

 

일부 사학자들은 실질적으로 삼국이 정립되어 삼국 시대가 전개된 것은 가야가 멸망한 562년 이후이므로 사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삼국시대의 정치

삼국 시대 초기 국가들의 정치는 국왕과 지방세력인 각 부의 연맹 왕국 형태였다. 고구려에는 5부가 있었으며, 백제역시 고구려-부여계의 이주집단이 부를 형성하였고, 신라에는 6부가 있었다. 이들 부는 독자적인 무력 행위나 외교를 할 수는 없었으나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독자적인 자치를 누렸다. 고구려에서는 3세기 전반까지도 소노부가 자체의 종묘와 사직, 즉 조상신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등 상당한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시간의 지남에 따라 왕권이 점차 강해져 관등제가 확충되고 기존의 집단별 상하관계를 왕을 중심으로한 일원적인 군신의 관계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왕권 확립의 결과 각 나라에서는 율령이 반포되고 호구를 조사하여 세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귀족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하였으며 실제 국정의 운영은 이들 귀족들과 왕의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대대로, 백제의 정사암 고사, 신라의 화백제도 등은 삼국시대 후기까지도 귀족의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의 언어

삼국사기에는 3국 사이에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 별다른 통역이 필요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지위지 동이전에서 고구려와 동예 옥저의 말을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양서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복장과 예절, 언어가 비슷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어휘와 이두 표기에서도 이들의 언어는 공통점이 많으며 중세 국어와도 통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 각 나라의 언어는 의사소통에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훈강(비류수)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켜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 백제와 전연의 공격으로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숙신과 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해서 지방과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가 되었다.

 

해서 지방을 근거지로 670년년부터 검모잠은 군사를 일으키고 왕족인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검모잠과 안승이 싸우게 되고, 6708월 안승이 검모잠을 살해하면서 검모잠의 부흥운동은 끝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671, 당나라 장수 고간이 요동지역에 남아 있던 검모잠의 잔당을 토벌하면서 전멸하였다.

 

고안승이 이끄는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은 호남 지방으로 이동하여 신라의 힘을 빌려 금마저(金馬渚 : 전라북도 익산)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웠다. 신라의 괴뢰국으로 활동하며 나당 전쟁에 참여하고 일본과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주고받았다. 호남 지방의 보덕국은 초대왕인 보덕왕이 신라에 친화적이었으나 보덕왕이 신라에 귀순하자 보덕왕의 친족조카 대문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보덕국의 고구려유민들은 신라의 95소경중 하나인 남원경(南原京 :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주되어 거문고 등의 고구려 문화가 한반도 남쪽에 정착되는데 관여했다.

 

요동반도에서는 보장왕의 손자 보원왕(寶元王)고보원이 측천무후의 힘을 빌려 당나라의 괴뢰국인 소고구려(小高句麗)등을 건국하였다. 소고구려는 당나라의 괴뢰국으로 있다가 발해에 편입되었다. 그후 고구려의 공백은 발해가 계승하였다가 망하자 왕자 대광현이 유민을 이끌고 왕건에게 귀순하며 고려로 이어졌으며 고려의 국호가 변형되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문 코리아(Korea)가 되었다.

 

백제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에 진출하고 전라도 지역의 마한 잔존 세력을 병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의 연이은 압박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수난을 맞았다.

 

침체에 빠진 백제는 무령왕때부터 중흥을 시작하여 성왕의 치세에 이르러 부여를 계승해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라하고 수도를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천도하는등 중흥 노력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본인도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의자왕의 잦은 실정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였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신라(新羅)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다. 초기에는 박, ,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7세기경 나·당 연합을 결성하여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또한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삼국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가야 연맹

가야(伽倻 혹은 加耶, 伽耶)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해 있던 부족국가의 연맹체이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532년 수도인 금관가야 등이 신라에 정벌, 투항하였고, 결국 대가야가 562년 최종적으로 항복함으로써 가야는 멸망한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의 패망 원인으로는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